서쪽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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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1995년 서울시산악연맹 청죽산악회에서 알프스 3대 북벽과 4대 북벽(아이거 북벽, 마터호른 북벽, 그랑드조라스 북벽, 드류 북벽)을 등반한 후 펴낸 등반보고서에 실린 글입니다.
 
등반한 지 오래된 자료이기 때문에 등반 장비, 등반 방식, 날씨, 운행일정, 화폐 단위, 교통 등이 현재와 많이 다를 수 있습니다.
 
1995년 청죽산악회는 3명의 대원이 한 시즌에 알프스 4대 북벽(아이거, 마터호른, 그랑드조라스, 드류)을 알파인스타일로 모두 등반/등정하였으며 김미선 대원은 한국 여성 최초로 그랑드조라스를 등반했습니다. 
 
이 글은 청죽산악회 1995알프스 원정대 심권식대장님이 그랑드조라스 북벽 등반조를 지원하며 쓰신 글입니다. 

알프스 3대북벽, 알프스 4대 북벽, 그랑드조라스 북벽 등반정보 등반지원 슈퍼맨과 원더우면 1995청죽산악회

4) 그랑드죠라스 등반 지원기

기록 : 청죽산악회 심권식


1995년 7월 18일 화요일 그랑드조라스 북벽 등반 어프로치하는 날

 
오전 9시 등산열차로 몽땅베르역에 내리니 맑은 날씨 속에서 건너편에 드류가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으며 우뚝 솟아있다. 
 
멀리 그랑드죠라스가 보이고 메르디글라스 빙하에는 많은 등반 객들이 크레바스가 넓게 벌어진 곳에서 프랑스식 등반기술을 익히고 있다. 
 
남규와 미선이가 죠라스를 등반하기로 결정하고 둘은 작은 배낭에 등반장비만 가지고 나는 대형배낭에 텐트와 B.C에서의 식량 등 지원장비를 메고 빙하 위를 걷는다. 
 
바람도 불지 않는 무더운 날씨와 빙하에서 반사되는 자외선 때문인지 얼굴이 후끈거린다. 
빙하에는 많은 크레바스가 형성되어 있다. 
주위의 산군에는 많은 등반코스들이 보인다. 

메르디글라스 빙하에서 찍은 그랑드조라스 1995.07.18촬영


 
렛쇼산장 아래 빙하 위 너덜지대가 형성된 것에 B.C를 설치하고 점심을 먹은 후 죠라스 벽 밑에까지 정찰을 나갔다.

설원을 지나 벽 가까이 가다보니 깊이를 알 수 없는 크레바스가 여러 군데 나타난다. 벽 밑에서 영국사람 2명이 비박준비를 하고 있다. 
 
상태는 눈이 군데군데 보이나 상당히 좋아 보인다. 
 
며칠 전 우정산악회는 좋지 않은 날씨 때문에 고생을 많이 했다고 했는데 현재는 물도 흐르지 않고 날씨도 무척 맑다. 
 
렛쇼산장 아래 B.C에서 벽까지는 2시간정도 소요된다. 
 
날씨는 샤모니 시내에서도 알아볼 수 있으니 날씨가 좋다면 차라리 벽 밑에서 비박을 하고 출발하면 체력과 2시간의 시간을 벌 수 있을 것이다. 
 
만일 갑자기 날씨가 흐려진다면 여분의 돈을 준비하여 렛쇼산장에서 자는 것이 좋다. 렛쇼산장은 그랑드죠라스를 바라보고 서서 왼쪽의 절벽을 한참 올라가면 있다.  작아서 잘 안보이기도 한다.

메르드글라스 빙하에 설치한 그랑드죠라스 북벽 베이스캠프


1995년 7월 19일 수요일 그랑드조라스 등반 1일차



등반을 위해 밤 12시 30분에 일어나 비빔밥과 미역국을 끓여 먹고 남규와 미선이의 등반 배웅을 하기 위해 죠라스 워커스퍼 캐신루트 출발점까지 함께 올라갔다.
 
새벽 4시 30분, 남규의 선등으로 바위와 설벽의 경계 면을 따라 두 놈이 등반을 시작했다.
 
놀부(나의 별명)는 2피치 째를 등반중인 두 놈을 올려다 보다가 수고하라고 소리를 쳐 격려를 하고 B.C로 내려갔다. 
내려오는데 자꾸만 뒤를 돌아 벽에 붙어있는 두 점의 불빛을 바라 보아진다.
 
부디 아무 사고없이 등반을 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B.C에 도착해서 다시 자보려고 했으나 잠이 오지를 않는다. 
 
그 동안 노력한 훈련량과 우리들의 정신력을 볼 때 충분히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 들지만 이번 시즌에 한국팀들이 알프스에서 사고를 많이 당해서인지 아무래도 긴장과 초조함이 마음속에서 떠나지 않는다.
 
오전 8시 40분, 1차 교신이 되어 현재의 상태와 위치를 물으니 레뷰파 크랙 2피치 아래쪽인 것 같다고 한다. 
 
10시 30분, 망원경으로 등반 조를 관측해보니 등반속도가 1시간정도 늦는 것 같다. 
날씨가 좋아서 B.C에서 등반조가 잘 보인다. 
 
11시부터는 코스에서 좌측으로 크게 벗어난 상태로 등반을 하고 있는 것이 보여서 무전으로 불러보지만 교신이 안된다. 
 
우리 팀은 계속 엉뚱한 곳으로 가는 것이 확인되고, 영국 팀은 검은 슬랩 부분에 있고 또 한 팀은 디에드로 부분을 등반한다. 
 
12시가 넘어서 교신으로 코스를 바로 잡아주고 무전기를 틀어놓고 등반 지시를 하고 있으니 공주교대팀 3명이 올라온다. 
 
오후 4시, 아까 좌측으로 많이 갔으니 우측으로 더 가야 제 코스인데 직상하는 게 보인다. 
무전으로 코스를 잡아주고 6시가 다 되어서야 75미터 디에드로를 등반하는 것이 보인다. 
 
날씨는 계속해서 좋고 내일과 모레도 좋다고 공주교대팀이 말한다. 
종일 빙하 위에서 벽을 망원경으로 쳐다보기도 여간 힘든 중노동이다. 
 
오후 9시, 날은 어두워지고 있는데 교신이 안 온다. 
내가 보내는 교신은 잡히는 것 같은데 등반조가 보내는 교신은 나에게 안 오고 있다. 
 
9시 50분, 남규는 검은 슬랩위에서 1피치를 더 올라갔다가 다시 다운을 하여 비박준비를 하는 듯 불빛이 오래 그 자리에 머문다.
 
자기가 안 좋은지 둘이 멀리 떨어져서 비박을 하고 있다. 
위쪽에도 비박지가 안 좋았나 보다. 고요 속에 묻혀있는 알프스, 해는 완전히 지고 설원에서 솟아난 것처럼 양쪽
으로 병풍처럼 늘어선 산군과 빙하 위의 빨간 텐트, 그리고 멀리 보이는 그랑드죠라스에 붙은 두 점의 불빛, 오늘 시간을 너무 많이 허비해서 내일도 정상도착이 어렵게 느껴진다.

우리는 등반을 떠나기 전 한국에서 준비해간 제물을 B.C에 차려놓고 안전등반과 산에서 사라져간 악우들을 위해 제사를 지냈다. 
 
날은 완전히 어둠에 쌓이고 B.C에는 공주교대팀과 나뿐이다. 낮에는 그렇게도 덥더니만 밤의 날씨는 우리나라 초겨울 날씨같다. 
 
하늘에는 수많은 별들이 알프스의 연봉들과 그 아래 빙하를 밝히고 있고 랜턴으로 등반 조에게 신호를 보내니 불빛응답이 온다.
 
내일 아침 뜨는 해와 함께 부디 순조로운 둥반이 되게 해달라고 마음속으로 간절히 기원하며 오지 않는 잠을 청한다.
 


1995년 7월 20일 목요일 그랑드조라스 등반 2일차

 
밤새 뒤척이다 새벽 6시 20분 미선이의 교신 시도가 전혀 안 잡히고 있다.
 
밖으로 나와 찬바람 속에서 망원경으로 벽을 보니 등반을 시작한다. 교신으로 등반지시를 하면 잘 들리는지 그대로 등반 하는 것 같다.
 
공주교대팀도 2피치 등반중인 모습이 보이고 우리 팀은 7시 30분, 회색 암탑을 등반중인 모습이 보이고, 10시 30분, 영국팀과 또 한 팀이 삼각설원 밑을 등반중인 모습이 보인다. 
 
밤새 웅크리고 앉아 비박을 하고 고통과 배고픔을 참아가며 북벽에서 오름 짓을 하고 있는 나의 후배 슈퍼맨과 원더우먼. 꼭 등반에 성공하리라고 확신은 하면서도 두 놈의 몸 상태를 알 수 없으니 답답하기만 하다.

공주교대팀 여자대원과 B.C에서 점심을 함께 하고 계속 벽을 관찰한다. 
 
1시 35분. 두 놈은 삼각설원 밑 부분이고 공주교대팀은 레뷰파 크랙에 있고 그 뒤에 프랑스 팀이 등반중이고 또 한 팀은 첫날 남규와 미선이가 왼쪽으로 잘못 들었던 길로 접어들은 후 헤매다가 레뷰파 크랙 쪽으로 하강을 하고 있고, 정상으로 통하는 꿀르와르 부분에는 영국 팀과 또 한 팀이 있으니 총 6팀이 오름 짓을 하고 있다. 
 
한낮이 되자 B.C에 햇빛은 나지만 찬바람이 불어댄다. 
빙하 위에 텐트를 쳤는데도 벌과 파리가 날아 다닌다. 까마귀도 텐트주위에 모여들어 빵부스러기들을 먹기 위해 분주하다. 그래. 먹어라. 먹어야 살지.
 
시간이 정지된 듯한 긴장감과 조마조마한 마음에 등반 조를 도와줄 수 없음이 미치고 환장하겠다. 
 
오후 4시에는 대구 한국산악회팀 남자4명과 여자2명이 도착하여 B.C를 설치한다. 빙하 위에는 한국의 3개 팀이 있으니 설악산에 온 듯한 착각이 든다.
 
18시 60분. 현재 B.C.에서 정상을 올려다보니 영국 팀은 정상에 도착한 것이 확인되고 두 놈은 정상으로 통하는 꿀르와르 밑 오버행 아래쪽에 있는 것이 보인다. 
 
남규와 미선이가 안 보이면 잘못된 것이 아닌가 하고 불길한 생각도 들고 두 놈을 찾기 위해 눈이 빠져라 망원경을 붙잡고 벽을 뚫어져라 쳐다본다. 
추락을 하면 1천 미터를 떨어지겠지.
 
2일 동안 등반을 했지만 오늘도 정상에 서기는 어려울 것 같아 오후 9시 10분, 등반 조에게 무전으로 비박 지시를 했으나 물과 식량은 얼마나 있는지 걱정이 된다. 
 
전에 나의 딸 엄지가 국민학교에 들어갈 때 학교에 가보니 다른 애들보다 키도 작고 너무 어려 보여서 학교생활을 잘 할 수 있을지 걱정이 되고 가슴 졸이던 그때 심정과 지금 북벽 바라보는 심정과 비슷하다. 
 
부디 오늘도 배고픔과 고통을 이겨낼 수 있기를 바라고 내일은 정상에 설 수 있도록 기원해본다.
비박지 위치에서 정상까지는 4~5피치정도 남아있는 것 같다.


1995년 7월 21일 금요일 그랑드조라스 등반 3일차 

 

아침 6시. 바람이 약간 불고 가스가 북벽을 가리고 있다.
 
해가 뜨기 시작하여 그랑드조라스 북벽 상단을 약간 비추고 있고 7시 현재 등반조의 모습이 관찰이 되지 않는다.
 
2일간의 등반으로 지쳐서 아직 비박쌕에서 나오지 않은 것인지 알 수가 없고 한편으로는 밤 사이 잘못되었는지 걱정이 된다.
 
8시 25분, 정상직하 왼쪽 꿀르와르와 오른쪽의 중간 릿지 형태의 부분에 모습이 보여서 안도의 숨을 길게 토한다.
 
9시 40분. 정상 아래 고정로프가 있다고 한 부분에 등반모습이 보인다. 
두 놈이 동시등반하는 것처럼 보인다.
 
10시 50분이 되자 남규와 미선이의 모습이 북벽을 완전히 올라서 정상 밑 눈처마 옆에 있는 것이 B.C에서 망원경으로 확인된다. 
 
옆에서 공주교대팀의 유명선 대원도 함께 확인한다. 수고했다! 고생했다! 이놈들아!!
비브람으로 갈아신으며 뭘 먹고 있는지 한참 그곳에 있다. 
그곳에서도 B.C가 보이는지 두 팔로 휘젓는 모습이 망원경으로 보인다.

11시 25분. 두 놈은 정상으로 올라서 B.C에선 더 이상 안보이게 되었다. 
 
2박3일의 고통을 이겨내고 그랑드죠라스 정상에 선 청죽의 슈퍼맨과 원더우먼. 으하하하! 귀여운 나의 후배들!
 
"야! 이놈들아! 고생했따아!" 크게 소리를 질러대니 그 동안의 답답했던 마음이 후련해지고 옆에서는 유명선씨가 깜짝 놀란다. 
 
공주교대팀의 등반 조로부터도 무전으로 축하한다는 말이 전해온다. 
 
두 놈이 정상너머로 사라지는 것을 확인하고 B.C를 철수하여 여전히 무거운 대형배낭을 메고 공주교대팀과 대구 한산 팀의 환송을 받으며 룰루랄라 빙하를 내려온다. 
 
며칠새 동안 크레바스가 지형을 바꾸어놓아 버렸는지 요리조리 돌아오느라 2시간 30분만에 몽땅베르역에 도착했다. 
 
건너편에 두 번째 등반목표인 드류가 나에게 손짓하는 것 같고 서서히 배도 고파온다.
내려올 때 명선씨가 준 쵸코파이 2개밖에 먹은 게 없다. 
 
샤모니 야영장에 도착하니 우정산악회가 마터호른에서 철수하여 도착해 있다. 
대충 짐정리를 끝내놓고 밥도 잔뜩해놨다.
 
드류는 야영장에서도 올려다 보이고 저녁 9시쯤에는 B.C로 돌아올 줄 알았던 두 놈은 밤 10시가 넘고 12시가 넘어도 오지를 않고 있다.


1995년 7월 22일 토요일 그랑드조라스 등반 4일차 



아무리 생각해도 정말 지원조는 못해먹을 짓이다. 힘들다. 
차라리 벽에 붙어있는 게 낫다. 
 
오전 9시, 샤모니 역전으로 가서 첫차를 기다렸다.
버스에서 내리는 두 놈의 얼굴을 보니 엉망이다.
미선이는 얼굴에 화상을 심하게 입은 데다 심하게 부어있고 남규도 지친 표정이 역력하다. 
 
너무나 반가웠다. 야시장이 열리는 곳에서 장을 봐다가 밥을 먹고 휴식을 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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