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반가 이명희는 단 한마디로 설명 가능하다. ‘한국 대표 여성 고산거벽 등반가’다. 여성 클라이머가 비교적 활동할 수 있는 공간이 적었던 시대에도, 거침없이 도전을 이어가며 여성 등반계를 선도해 온 클라이머다.
이명희가 등반에 입문한 계기는 우연이었다. 친구와 북한산을 올랐다가 호기심에 만경대를 올랐고, 마침 만경대 리지를 타던 바위꾼 송태선의 도움을 받으며 등반의 맛을 본 것. 그후 이에 매료돼 타이탄 산악회에 가입해 본격적으로 등반을 배웠다.
“20대 초반 여자가 매일 산만 가니깐 아버지가 무척 반대했어요. 당시 산에 대한 인식은 ‘계곡에서 술과 고기를 먹는 행락’이었거든요. 그래서 산에 가는 걸 막으려고 배낭을 다 불태우거나 로프를 잘라 버리기도 하셨죠.”
하지만 아버지 몰래 일탈을 도운 어머니의 도움으로 이명희는 산에 빠져들 수 있었다. 등반가로서 성공한 지금도 부모님이 반대하냐고 묻자 그는 웃으며 “지금도 등반같이 위험한 건 하지 말라고 잔소리를 하신다”며 “그런데 다른 사람에게 나를 소개할 때는 유명한 등반가 이명희라고 한다”고 전했다.
1992년부터 등반을 시작한 이명희는 무서운 속도로 국내 암벽 루트를 연파해 갔다. 이명희를 움직인 건 본인 스스로 “미친 호기심”이라고 했다. 남이 하는 등반이나, 남이 하지 않는 등반이나 전부 해보고 싶었다. 더욱 다양한 등반에 대한 욕구가 가슴속에서 불탔던 그는 눈을 더 높고 어려운 벽으로 돌린다. 고산거벽이다.
“등반을 시작한 지 6~7년쯤 됐을 때 미국 엘 캐피탄에 갔어요. 당시 최승철 선배랑 같이 등반하곤 했었거든요. 그때 엘 캐피탄 등반에 대한 얘기를 많이 들었어요. 이야기 속 엘 캐피탄의 모습이 너무나 흥미로워 또 다시 제 호기심을 자극했어요. 그래서 엘 캐피탄으로 갔죠.”
엘 캐피탄에서는 거벽 등반의 새로운 어려움을 발견했다. 바로 생활. 이명희는 “같이 가기로 했던 채미선이 비자가 안 나와 다른 팀과 원정을 함께했다”며 “아무래도 의식주를 모두 함께해야 하는데 잘 모르는 사람과 같이 있다 보니 불편한 점이 많았다. 그래서 다음 원정부터는 정말 잘 아는 사람과 같이 가야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래서 2001년 카라코룸 멀티4 원정은 마음이 맞는 사람들과 같이 갔다. 고 김창호, 최석문 등 걸출한 남성 등반가 6명과 함께 떠난 원정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자신의 한계를 느끼고 큰 좌절을 겪게 된다. 그는 원정대의 유일한 여자였다.
“한국에서는 분명 등반력의 큰 차이가 없었는데 고산에서 그 능력을 끌어내는 능력은 차이가 있더라고요. 그래서 벽에서 맥을 못 췄죠. 정말 엄청난 좌절감을 느꼈어요. 또 상상 이상의 낙석이 쏟아지자 불안감과 생존에 대한 두려움도 찾아왔죠. 마치 민폐녀가 된 느낌이었죠.”
좌절감을 이겨낼 수 있었던 건 사랑이었다. 혼보르(5,500m)를 하산하는 도중 수백m의 크레바스에 빠질 뻔한 걸 최석문씨가 낚아챈 덕분에 살았다. 이 과정에서 서로 엉키며 날카로운 피켈이 최씨의 눈 위를 찍어 상처를 냈다. 최씨는 “흉터가 생겼으니 책임져야 한다”고 했고, 이명희는 “내가 데리고 살게”라고 답했다. 귀국 직후 곧 결혼식을 올렸다. 둘은 당시 4~5년 정도 교제하고 있던 사이였다.
“등반은 기록을 의식하면 안 돼”
이명희는 결혼 후 허니문베이비로 아들 보건씨가 생겨 당분간 육아에 전념했다. 집에 있는 시간 동안 그의 마음속에는 벽에 대한 호기심과 투쟁심, 그리고 자존심이 늘 꿈틀거렸다. 결국 산후우울증에 걸리고 말았다. 우울증을 이겨낸 건, 결국 등반이었다.
“아이가 조금 크자 다시 벽에 붙었어요. 애엄마가 되자 더 벽에 붙는 시간이 소중해졌죠. 아이를 맡기고 나온 순간이니깐 더 집중하고, 대충하지 않고 최선을 다하자고 마음을 다잡았어요.”
이때부터 이명희는 익스트림라이더인공등반대회 4년 연속 1위, 2006, 2011년 전국빙벽등반 선수권 대회 여자부 1위를 기록하는 등 탁월한 활약을 펼쳤다. 또한 자연 암벽에서도 기록을 쏟아냈다. 설악 적벽 에코길, 독주길 여성 최초 자유등반, 남미 피츠로이 아시아 여성팀 초등, 도봉산 강적크랙(5.13a) 여성 초등 등 암벽과 자신, 그리고 성의 한계까지 모두 넘었다.
그러나 그는 단지 “한 번도 기록을 세우려 등반한 적은 없었다. 등반하고 나니 여성 초등이었다고 들은 경우가 대부분”이라며 “등반은 기록을 의식하면 안 된다. 기록을 의식하면 부담을 갖게 된다”고 말했다.
또한 여성 등반가들끼리 뭉쳐 원정을 떠나 성과를 올리기도 했다. 2006년 알프스 북벽 등반부터 남미 피츠로이도 그랬다. 이명희는 “혼성팀으로 가면 나도 모르게 남성에 등반적으로 의존하는 경향이 있었다”며 “여성끼리 가면 타성에 젖지 않고 내가 등반의 주인이 될 수 있어 결과물에 대해서 더 희열을 느낄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수많은 등반 기록 중 이명희가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등반은 2015년 도봉산 강적크랙이다. 이 루트는 난이도 5.13a로 국내 크랙 등반 중 최고난도 루트지만, 이미 그보다 더 어렵고, 더 높고 긴 루트도 등반한 경험이 있었다.
“난이도 때문이 아니라 좌절과 한계를 너무 많이 느낀 등반이어서 그랬어요. 여긴 손가락만 넣어 재밍해야 하고, 각도도 세서 등반은 물론, 고통도 이겨내야 하거든요.”
이명희는 강적크랙을 등정하기 위해 15번이나 루트를 방문했다. 한 번 가면 평균 3번 등반을 시도하니 총 45번이나 도전한 셈. 숱한 실패를 쌓으면서도, 그는 스스로 자신이 조금씩 향상되는 걸 느꼈다. 자신이 업그레이드되는 느낌에서 그는 “무한한 기쁨을 얻었다”고 했다.
교육자로 변신…공감클라이밍스쿨 운영
최근 이명희는 남편 최석문씨와 문성욱, 안종능씨와 함께 등반학교 ‘공감클라이밍스쿨’을 열었다. 이들은 30여 년간 한국은 물론 세계 곳곳을 돌아다니며 수많은 등반을 펼쳤고, 해외 클라이머들과 교류하며 직접 등반 기술을 체화한 국내 굴지의 등반가들이다. 그야말로 걸어 다니는 최고의 등반 교재인 셈이다.
“우리 때는 어디 가서 배울 곳도 없었고, 지금처럼 인터넷이 발달하지도 않아서 정말 맨 땅에 헤딩하듯 배워야 했어요. 지금의 등반가들은 우리처럼 고생스럽게 배우지 말고, 좀더 체계적으로 배웠으면 해서 공감클라이밍스쿨을 운영하게 됐습니다.”
다양한 등반 교육과정 중에서도 가장 눈길을 끄는 건 ‘트래드 클라이밍’이다. 이명희, 최석문 부부는 국내 트래드 클라이밍 문화를 이끄는 대표 클라이머. 트래드 클라이밍이란 전통 방식의 등반을 의미하며, 바위에 박힌 볼트에 줄을 걸며(클립) 오르는 현대 스포츠 클라이밍과 다르게 확보물을 설치해가며 오르는 등반을 의미한다. 위험성과 모험성이 크고, 인간의 흔적을 바위에 남기지 않을 수 있는 등반 양식이다.
“트래드 등반은 자연과 사람을 동시에 존중하고 등반지를 훼손하지 않고 보존할 수 있는 방식이에요. 등반지를 미래 등반가에게 온전히 남겨줘 그들의 창의성을 키워줄 수 있는 것이죠.
한국의 암벽루트를 보면 확보물 설치가 충분히 가능한 크랙에도 무분별하게 볼트가 설치돼 있는 걸 볼 수 있어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오로지 올라가는 것만 생각해서 일어난 비극이죠. 우리나라 등반계의 창피한 일면입니다.”
마지막으로 그에게 알피니즘에 대해 물었다. 사실 2년 전 그는 여성산악인 토론회에서 “한국은 왜 알파인 클라이밍에 그렇게 목매는지 모르겠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우리나라는 유독 ‘알파인 클라이밍’이란 단어를 우상화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마치 알파인 등반이 상위권의 등반인 것처럼 과시하죠. 나도 알피니스트지만 이런 부분은 못마땅했어요. 다른 등반도 어려움과 힘듦이 공존해요. 최고의 등반이 곧 알파인 등반은 아니거든요.”